미래가 보이지 않았다
전에도 이야기 한 적이 있지만, 나는 한국에서 직장 생활을 15년 이상 했다. 그리고 마지막 8년 정도는 한국에서 탑 3에 든다는 N모 게임 회사에서 일을 했었는데, 그나마 한국에서 가장 선진한 직장 문화를 가진 곳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소위 좋소라 불리는 꼰대들 가득한 회사와는 당연히 기업 문화에 있어 차이가 많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절대 바뀔 수 없는 수직적인 문화는 어쩔 도리가 없었다.
나는 야근을 하지 않는 것으로 유명(?) 했다. 어느 직장을 가든, 이유 없는 야근은 가능한 하지 않으려고 최선을 다했다. 그래서 많은 상사들이 나를 조질 기회만 노리고 있었다. 내가 회사를 그만두는 날, 솔직히 고백한 상사도 있었다. 야근을 하지 않는 것 때문에 뭐든 하나 꼬투리 잡으려고 벼르고 있었는데, 기회가 없었다고. 이 곳은 영세한 출판 회사였기에,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 N모 회사에서도 이런 강요를 받을 것이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
팀 분위기라는게 대체 무엇일까?
어느날 팀장이 나를 따로 불러서 물어보았다. 왜 일찔 가냐고. 나는 애초에 질문이 이해가 되질 않았다. "일찍 가는게 아니라 퇴근 시간에 가는 건데요?"라고 물어보자, 그제서야 질문을 바꾼다. 왜 야근을 하지 않느냐고. 나는 오히려 되물었다. 왜 야근을 해야 하냐고. 나는 한 번도 일정을 어긴 적도 없고, 업무를 대충한 적도 없으며, 항상 1.5배 이상의 성과를 내왔다고 자신했다. 그런데 돌아온 답변은, 내가 정시 퇴근을 하는 것 때문에 팀 분위기가 흐려진단다. 내가 야근을 해야 다른 팀원들이 다 기뻐하고, 힘을 낸다는 이야기일까? 나는 궁금했다. 그래서 야근을 해보았다.
야근을 하기 위해 나는 일부러 일을 남겨두었다. 시간에 쫓기는 상황이 아니다 보니, 확실히 여유가 생겼다. 회사에 와서 아침도 챙겨 먹고, 동료들과 카페도 가고, 저녁 먹은 뒤에는 같이 게임도 하고... 신기하게도 더 많은 시간을 회사에서 보냈지만, 오히려 하는 일은 줄어들었다. 그러면서, 나는 이 회사에서 이렇게 나이를 먹어가는 나 자신을 상상해보았다. 미래가 보이지 않았다.
정당한 보수가 없는 것이 가장 큰 문제이다
캐나다에서는 야근을 하기 위해서는 매니저의 허락을 받아야 하며, 또한 그 사유가 정당해야 한다. 예를 들어 밤에 한 시간 정도 점검을 위해 일을 해야 한다고 하면, 추가 시간을 일하는 것이 아니라 낮 시간 근무를 줄이는 식이 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왜냐하면 일을 더 하는 만큼 수당이 더 나가기 때문이다. 여기서는 풀 타임이든 파트 타임이든 거의 시급으로 치는데, 주말이나 공휴일에 추가 근무를 해야 하는 상황이 만약에 온다면, 법에 따라 1.5배의 시급을 지불해야 한다.
그렇다보니, 내가 돈을 많이 벌기 위해 야근을 미친듯이 하고 싶다고 해도 시켜주질 않는다. 오히려 제 시간에 끝내지 못하고 초과 근무를 해야 하는 상황이 온다면 이는 즉 본인의 능력 없음을 증명하는 사례가 되기 때문에 오히려 안 좋은 인사 평가로 이어질 수도 있다.
오히려 일 하는 양은 더 많다
나 같은 경우 한국에서 직장 생활을 하다가 캐나다에 왔을 때, 오히려 업무 강도가 높다는 느낌을 받았다. 요즘 한국 회사들은 어떤지 모르지만, 적어도 내가 직장 생활을 하던 때와는 분위기가 많이 달랐다. 업무 시간에 모여서 농담 따먹기 하는 사람이 별로 많지 않다는 것이다. 이곳에서는 애자일 방법론이라는 업무 방식을 사용해 한 스프린트(보통 2주)에 한 번씩 성과를 내는 식인데, 미리 스프린트 동안 무엇을 할지를 다 정해놓고, 매일 아침 얼마나 진행되었는지를 매니저와 함께 확인하는 식이기 때문에, 대충 빠져나갈 구멍이 없다. 하루 걸일 일을 3일 걸릴 거라고 이야기해두고 땡땡이를 친다는 것도 불가능하다. "아, 이 사람은 이 하루짜리 일이 3일 걸리는 무능한 사람이구나"라고 찍히거나, 아니면 애초에 "왜 그 업무가 3일이 걸리는지 세부 계획을 보여줘"가 되기 때문이다. 이렇다 보니, 할 일은 정해져 있고, 제때 쉬고 싶다면 정말 집중해서 열심히 해야 되는 식으로 일이 굴러간다.

가장 큰 차이점은, 점심을 같이 모여서 먹는다는 것이 흔지 않은 일이라는 것이다. 한국에서는 점심 시간 1시간 동안 밖에 나가서 밥도 먹고, 커피도 마시고, 수다도 떨고, 이렇게 보냈다. 그렇다보니 총 직장에 있는 시간이 근무 시간 8시간 + 점심 1시간 해서 보통 9시간이 된다. 9시에 나가서 6시에 퇴근하는 것이다(할 수 있다면).
캐나다에서는 근무 시간 7시간 30분 + 점심 시간 30분 해서 8시간이 된다. 9시에 출근하면 5시에 퇴근하는 것이다. 이렇다 보니 점심 때는 정말 딱 밥만 먹고 돌아온다. 주로 자리에서 도시락을 먹거나, 카페테리어에 가서 가볍게 요기를 한다. 그렇기에 저녁이 있는 삶이 가능해지는 것이다.
내 삶의 주도권을 내가 가진다는 것
정해진 업무 시간내에 정해진 업무를 철저히 한다는 것은 어찌 보면 당연한 이야기이다. 나는 한국에서 처럼 적당히 눈치보며 쓸데없는 야근을 하는 것을 극혐하기 때문에, 캐나다에서의 직장 문화가 나에게는 훨씬 잘 맞다. 또한 내가 캐나다의 직장 문화에 있어 가장 좋아하는 점은, 휴가를 쓸 때 눈치를 보지 않는다는 점이다.
연말쯤 되면 매니저가 나에게 항상 물어본다. 이번에 휴가 언제 쓸거냐고. 그런데 이 질문은, "모든 사람이 사무실을 비우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해 팀원들 끼리 휴가를 나눠서 다녀오자"는 의미가 절대 아니다. 행여나 내가 이런 오해를 할 까봐 굉장히 조심스럽게 물어본다. 사실 저 질문의 의도는 "이번에 연말에 사무실에 있는 사람이 N명이 있기 때문에 그 수에 맞춰서 업무량을 조정해야겠다"라는 뜻이다. 언젠가는 2주 동안 아예 모든 팀원들이 휴가로 없던 때도 있었다.
물론 서버 관리라던가 고객 응대 업무 등 필수 적인 보직을 제외하고의 이야기이지만, 이런 직책에 있는 사람들 조차 휴가를 쓴다고 하면 다른 백업 인원을 투입하지, 절대 휴가를 못 쓰게 하지는 않는다. 덕분에 나는 내 삶의 주도권을 가지게 되었고, 이러한 직장 문화를 감사하게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