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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캐나다 취업 - PSW

by 캐나다7년차 2024. 7. 23.

  역시 이민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도대체 무엇을 해서 먹고 살 것인가 일 것이다. 보통 한국분들은 유학후 이민이나 LMIA 케이스가 많다. 부부의 경우 한 사람이 먼저 칼리지를 가서 직장으로 연결된 후, 나머지 사람이 칼리지를 가기도 한다. 우리 부부의 경우, 남편이 졸업 후 직장을 잡은 상태였지만 내가 꼭 칼리지를 가야하는 지 고민을 하고 있었다. 빠듯한 형편에 학비를 또 들이는 것도 부담이고 (아직 영주권을 따기 전이라 인터내셔널 학생 학비를 내야했다. 보통 로컬학생의 3~4배) 뭘 공부해야할 지도 감이 잡히지 않았다. 그 때즈음 지인을 통해서 가까운 칼리지에 무료직업교육 기회가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주정부 지원 무료직업교육프로그램

  캐나다에서는 공급이 부족한 직업군들에 대해 정부가 다양하게 지원을 한다. 트레이드잡을 위해 칼리지나 직업학교로 진학하면 장학금 제도도 많다. 나는 사람들 돕는 일을 하고 싶었고 마침 가까운 칼리지에서 산학연계로 무료 트레이닝을 받을 수 있었다. 5개월 PSW 과정이었는 데, 팬데믹 이후 PSW(Personal Support Worker)들이 많이 부족해서(사실 헬스케어 쪽은 항상 사람이 부족하다.) 보통 2년 과정인 칼리지 PSW프로그램을 초고속으로 진행하는 것이었다. PWS파견회사가 고용과 실습을, 컬리지가 교육을, 비용은 정부에서 대는 방식으로 인력을 충원하려는 시도였다. 당시 PR도 없는 신분이었지만, 나도 지원대상이 될 수 있었다. 이런 방식이 꽤나 성공적인 것인 지 현재도 여러 주에서 이런 무료교육프로그램들을 진행하고 있다.
 

등록 과정

  트레이닝 전, 회사쪽과 잡인터뷰를 하고 계약서를 썼다. 스피킹에 자신이 없어 엄청 얼었지만, 미리 예상질문에 맞춘 답변을 정리해 두고 달달 외워서 전화면접을 봤다. 프로그램에 들어가기 위해서 영어점수나 학력 같은 건 전혀 필요 없었다. SIN(Social Insurance Number)가 있고 범죄경력조회결과가 깨끗하고, 결핵(TB) 검사에 이상이 없으면 되었다. 집집마다 방문하면서 일을 하는 직업이지만 운전면허도 필요 없었다. 본인만 괜찮다면 버스로 이동하면서 일을 하면 되었다. 나의 경우는 자차로 운전을 했고, 만약 대중교통을 사용했다면 훨씬 힘들었을 듯하다. 
 

Image by freepik

 

수업 과정

  무료 책자와 실습용품들이 제공되었고 5개월 동안 이론, 실습 과정을 거쳤다. Mosby’s Canadian textbook for the support worker라는 교재를 기본으로 컬리지 소속의 강사가  수업을 진행하였고(당시는 팬데믹 상황이라 온라인수업), 파견회사의 교육장소에 가서 마스크 피팅, 마네킹을 활용한 실습 등을 했다. 무료로 First Aid & CPR 자격증과 Food Handling 자격증도 땄다. 최저시급 수준이었지만 유급으로 Placement(현장실습)을 했다. 회사 소속인 내 담당 Mentor가 배정되서 Shadowing이라고 그분을 따라 일하는 것이었다. 
 

취업

  모든 과정을 거친 후 1년 동안 이 회사에서 일하도록 노력하겠다는 계약서를 쓰고 나는 회사 소속으로 일하게 됐다. 인맥이 없던 내게는 나를 써준다는 것 자체가 감사한 일이었다. Retirement Home과 커뮤니티의 여러 가정을 다니며 퍼스널케어를 돕는 일을 하게 되었다. 샤워, 간단한 요리나 청소, 빨래도 돕고 ROM(Range of Motion)이라고 간단한 운동도 보조한다. 매번 낯선 집에 가서 낯선 사람들을 만난다는 것이 쉽지는 않았다. 1시간 타임슬랏을 기본으로 계속 이동하는 것은 운전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나에게 고역이었다. 정말 부자인 사람도 있었고 정말 가난하고 끔찍한 환경에 사는 사람도 있었다. 부자는 많은 돈을 내고 PSW를 고용하고 가난한 사람들은 정부의 지원으로 PSW의 도움을 받는다. 
 

개인적인 소회

  PSW는 정말 자신의 뜻이 확고해야 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짧은 기간이었지만 정말 다양한 가정과 사람들을 보았고 노인들의 삶을 보면서 내 노후는 어떨 지도 생각하는 기회가 되었다. 내 부모님이 도움을 필요로 할 때 내가 여기서 배운 것을 쓰자는 것도 이 일을 했던 동기 중의 하나였다. 이제는 그만두었지만 그 때 방문했었던 여러 할머니, 할아버지나 장애인들에 대한 좋고 나쁜 기억들이 아직도 남아있다. 치매에 걸려서 락박스로 잠긴 집안에서 홀로 지내시는 분들도 많았고, 가족들과 함께 지내고 있지만 그 가족들이 쉴 수 있도록 외부의 도움을 받는 경우들도 있었다. 남미에서 이민 온 할머니는 고향의 노래를 불러 주시고, 젊어서 할리우드에서 활동했다는 할머니 집의 벽에는 왕년의 사진들이 가득했다. 마술사였던 부부의 아파트에는 소품이 든 박스들로 발 디딜 틈이 없고, 허리가 다쳐 소파에서 모든 생활을 하는 아줌마는 세상 다정한 분이었지만 집안은 쓰레기와 오물 천지였다. 바퀴벌레가 가득한 집, PSW가 방으로 절대 못 들어오게 하고 빨래도 못 가져가게 해서 몰래 훔쳐(?)다가 코인런드리에 돌려서 가져다준 기억, 매달 400만 원씩 드는 양로원이 버거워 다른 곳으로의 이동을 고민하던 할머니,  큰 수술후 Bed ridden(자리 보전) 상태인 할머니가 차차 나아서 걸을 수 있게 되는 과정에서 가족들의 따뜻한 지지 등 이 짧았지만 많은 인생과 희로애락을 보았던 시간들이었다.
 
  여러 가정들을 방문하며 일을 하던 중 나는 우연한 기회를 만나게 된다. 그리고 이 기회는 나를 다른 직업으로 이끌게 된다. 그 이야기는 다음 번에…